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로스 2세 (문단 편집) === 근친혼의 결정체 === ||[[파일:charles II of spain family tree.jpg|width=100%]]|| ||<:>'''조상들의 [[근친혼|{{{#fff 근친혼}}}]]을 정리한 표'''[* 합스부르크 가문의 철자가 Habsburg가 아닌 Ha'''p'''sburg로 되어 있다.][* 그림의 1st Cousins는 사촌, 2nd Cousins는 육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인명이 영어식으로 번역된 이름으로 표기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영어식으로 찰스 2세(Charles II), 펠리페 2세는 필립 2세(Philip II)라 적는 식. 동명이인의 구분을 위해 재위한 국가의 국명을 붙여 구분한다.]||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과도한 [[근친혼]] 때문에 심한 유전병을 앓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카를로스 2세는 그 결정체였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합스부르크 왕가]]보다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스페인의 전신인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라곤 왕국]] 시절부터 근친혼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카스티야와 아라곤 모두 같은 트라스타마라 왕조였다.] 그의 부모에 이르기까지 부계로 4대에 걸쳐 계속 근친혼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귀천상혼]]이라는 특성상 조상의 결혼이 족외혼이 되는 건 불가능한 가정이기는 하지만[* [[19세기]]나 [[20세기]]에도 6~8촌의 근친혼은 많이 일어났다. 당장 現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그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도 [[빅토리아 여왕]]을 기준으로 따지면 둘 다 4대손으로서 8촌이 되고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9세]]를 기준으로 따지면 여왕은 4대손, 부군은 3대손이라 7촌이 된다.], 카를로스 2세의 조상은 그걸 감안하더라도 심한 편이었다. 조상들의 근친혼을 정리한 표에서 [[펠리페 1세]]와 [[후아나 1세(카스티야)|후아나 1세]]의 후손이 아닌 사람은 [[포르투갈의 이자벨]],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국왕 [[크리스티안 2세]],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 [[로렌 공국|로렌]] 공작 프랑수아 1세 이 다섯 명 뿐이며 그마저도 포르투갈의 이자벨은 후아나 1세의 자매가 낳은 딸로 남편인 [[카를 5세]]와는 4촌이었다. [[주걱턱]]은 [[합스부르크 가문|합스부르크 왕가]]의 대표적인 집안 내력인데, 카를로스 2세의 경우 턱뼈가 비정상적으로 크다보니 입을 제대로 다물 수 없었으며, 침을 자주 흘리고 음식을 씹지 못했다. 혀도 너무 커서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데 지장이 있었다. 게다가 35세에 [[탈모]]가 와서 대머리가 되었고, 상체는 과하게 큰데 하체는 가늘고 짧아서 '''다리가 상체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서''' 절름발이가 되었다. 여기에 [[뇌전증]]까지 있었다. 신체적 장애가 심각한 반면 [[지적장애]]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를로스 2세 스스로 친정을 하는 동안에는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으며, [[지적장애인]]이라면 절대 처리할 수 없는 수준의 행정을 직접 맡기도 했다. 그와 만난 타국의 외교관들도 그가 내성적이고 우울하며 못생겼다는 등의 부정적인 묘사를 했을지언정 지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현대의학계에서는 전해지는 증상으로 미루어 보아 [[뇌하수체]] 호르몬 이상 혹은 어릴 때 걸린 뇌질환의 합병증 때문에 장애가 생긴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같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친누나인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장애나 유전병을 앓지 않았다. 심지어 어린 시절부터 금발의 천사같이 너무나 귀엽고[* 다만 성장하면서 합스부르크 특유의 외모가 나타났다.] 총명하고 발랄하여 부모인 [[펠리페 4세]] 부부는 물론, 외조부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애정을 독차지했고 외삼촌 겸 남편인 [[레오폴트 1세]]도 그녀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작품 라스 메니나스(시녀들)가 바로 어린 시절의 마르가리타 테레사를 그린 그림. 사실 인판타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나기 전까진 스페인 왕국의 차기 여왕 후보로 간주되었던 공주다. 유독 초상화가 많이 남은 것[* 사진이 없는 시대에 왕족의 초상화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구다. [[유화(미술)|유화]]가 빨리 그려지는 그림도 아니고, 제작 비용도 상당한 편이며, 어린 공주가 꽉 죄는 드레스를 차려입고 오래 부동자세를 취하게 만드는 일의 난이도는 결코 낮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걸 따져보면 결국 왕실이 초상화 작업을 지시했고 적극 지원했을 거란 의미가 된다. 당시 궁정화가 벨라스케스도 이 공주를 그리는 데에 열과 성을 다하여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세 살, 다섯 살, 일곱 살, 여덟 살을 시작으로 펠리페 4세의 장례 상복 차림인 열 네살의 모습까지 계속해서 화려한 초상화들을 그렸다.]은 이 때문으로 추정된다.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의 첫 아이이자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손이었고, 이미 세상을 떠난 형제자매들에 비해 심신이 건강한 편이었다.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난 이후로도 스페인 왕실은 여전히 인판타가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기 때문에 계속 그녀를 왕실에 붙잡아두려고 했다. 그러나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략 결혼을 통한 결속을 위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넘어가 외삼촌 겸 고종사촌인 남편과 혼인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그리고 카를로스 2세는 누나에 비해 초상화가 거의 없으며 전해지는 작품도 성인 이후, 매우 어두운 배경에 비교적 흐릿하게 표현된 그림뿐이다. 일단 장애 때문에 외모가 보기 썩 좋은 편은 아니라는 것은 둘째치고, 얼굴만 봐도 건강에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 빤히 다 때문에 왕권의 안정을 위해 가급적 특징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2세는 어릴 때부터 각종 병을 앓을 때마다 온갖 기도와 미신적 행사의 대상이 되었고, 악마를 쫒는 부적을 달고 다니거나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밖에 나가거나 사람 만나는 것을 삼가고 어두운 방에만 머물러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집안 특유의 높은 유산율 및 [[영아 사망률]]은 그녀도 결국 피해가지 못했고[* 합스부르크 왕실 출신들에게서 난 적자들은 당대 농민의 아이들보다도 [[유아 사망률]]이 '''4배'''나 높았다.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네 명의 자식을 낳았으나 3명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나마 오래 살았던 딸 마리아 안토니아도 23세에 요절했다.] 17세부터 연이은 임신과 출산의 반복 끝에 마지막 아이를 사산하며 산후 후유증으로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카를로스 2세는 무수한 장애와 질병을 안고도 그의 모든 적/서출 형제자매들보다 오래 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